VANUATU/TRIP

바누아투 역사 속으로 2

Bluepango1 2007. 5. 5. 08:39

 

 

 

< 이 글은  바누아투에 미국 보건 전문 요원으로 자원 봉사를 나온 민정선씨가 쓴 글입니다.

원본은 http://www.bluepango.com 의 korean - Volunteer 메뉴로 들어 가시면 원문 및 기타 자원 봉사 이야기들이 다양하게 올라 와 있습니다. >

 

 

바누아투의 서양인들의 발길이 닿기 시작한것은 19세기 중반 부터라고 알려져있습니다.  미개지역들의 서구화가 보통 그렇듯이 바누아투에도 전도자들의 도착으로 시작됩니다.  공식적으로 기록된 전도기록은 1839 11 18일로 알려져 있습니다.  John Williams 라는 전도사가 London Missionary Society 의 후원으로 Erromango 에 상륙합니다.  Williams 는 이미 이례적으로 성공적인 전도활동을 폴리네지아 섬에서 펼쳐 대부분의 섬들을 기독교로 전도한 후 이 곳 바누아투로 건너온 것이었습니다.  불행히도 John Williams도 섬의 상륙한지 몇 분 되지않아 그만 원주민들의 화살에 살해되고 ... ... 그들의 식량이 되버리는... 불운을 겪었다고 합니다.  그 후로도 끊임없이 이어지는 전도의 물결이 계속되지만 10여명이 유사한 방식으로 사살되었다고 예측되고 있습니다.  그 후로 Erromango '성인들의 섬'으로 알려지고 있죠. 

 

1847년에는 'British Sovereign' Efate 섬 해안에 파선하는 불운을 겪었습니다.  가라앉는 배에서 20명이 간신히 작은 구조선으로 탈출해서 도착한 해안에서 화려한 환영식을 받았다고 합니다.  잔치상이 제발로 걸어들어오는데 누군들 싫다고...  ^^;;  농담임다.  결과만 말하자면 살아나온 선원은 2명뿐이랍니다. 

 

19세기 후반의 바누아투의 운명은 암흑을 맞이합니다.  'Black birders' 이라고 불리는, 노예상인들보다는 쪼끔 더 나은, 사람들이 바누아투 섬을 방문하기 시작합니다.  바누아투의 원주민들을 납치해서 인근 뉴칼레도니아의 니켈탄광이나, 피지, 사모아, 호주등에 위치한 사탕수수나 목화 plantation 에 넘기는 사람들입니다.  납치된 대부분의 인력들이 수년간의 잔인한 학대를 견뎌내야했고 '살아남은' 원주민들만 자신의 고향으로 돌려보내졌습니다.  호주 퀸즈랜드에 보내진 4만명중 3만명도 채 살아돌아오지 못했다고 하니 그 잔학성을 조금이지만 감을 잡을수가 있습니다.  뉴칼레도니아, 피지, 사모아에 보내진 만명정도의 인력에서 얼마나 살아남았는지는 남겨진 기록이 없지만 뉴칼레도니아의 탄광이 'graveyard 묘지' 라고 알려졌었다고 하니 대략 짐작이 갑니다.  몇 안되는 살아돌아온 생존자들은 당연히 백인들에 대한 적대감을 가지고 돌아왔겠지요.

 

1878, Ambae 섬에 Sikeri 라는 이름을 가진 젊은이가 이런 노동후에 돌아와서 보복의 기회를 찾았던것은 당연한 일인지도 모릅니다.  바누아투의 남자들에게 사회적 지위를 얻는다는것은 대대적으로 내려오는 풍습을 따라야한다는 조간이 붙습니다.  예를 들자면 오늘날까지도 전해지는 풍습중에 추장이 추장으로써 인정 받기 위해서는 수많은 돼지를 제물로 바쳐서 사살해야한다는 것이져.  돼지는 바누아투에서 부와 같습니다.  하지만 19세기 전후만 하더라도 인간 제물이 돼지대신 사용되기도 했었다고 합니다.  그리하여... Mystery 라는 배가 섬에 도착했을때 Sikeri 와 그의 친구들이 호박이 덩쿨째 굴러들어왔다고 생각했다고 해도 전혀 이상할게 없었다는거져.  6명의 선원이 그 자리에서 살해되고 저녁메뉴가 되었습니다.  유사한 운명이 또한 May Queen 의 선원들에게도 떨어집니다.  이번에는 Ambae 의 한 추장의 아들의 제사를 위했다고 하네요.

 

하지만 Ni-Vanuatu 인들이 섬에 닻을 내린 모든 백인들을 사살한건 아닙니다.  아마도 인류 역사상 바누아투 인들만큼 서방인들의 도착으로 피해를 크게 본 나라도 없을 듯합니다.  자 이야기는 다음 호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