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ANUATU/LIFE STORY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은 참으로 언어도단 아닌가 합니다.

Bluepango1 2011. 8. 6. 17:06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은 참으로 언어도단 아닌가 합니다. 솔직히 사랑할 수는 없고 그냥 내비둬라 하는게 현실에 더 어울리지 않나요.

 

제가 몇 일전에 농장 매각 정보를 올리며 '원수를 사랑하라'란 글에 대한 회원님이 달아 주신 댓글내용입니다.

예전에 저 역시도 성경을 읽을 때마다 이건 나와는 상관 없는 일이다라고 생각했었고, 내가 용서하지 않으면 어떻게 할 수 있겠는가라는 자포자기의 마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년 전에 새롭게 하나님께서 제 마음을 완전하게 만져 주신 다음부터는 조금씩 달라졌습니다.

하나님을 새롭게 만났을 때 역시도 '어떻게 원수를 사랑할 수 있는지요'라며 수 차례 물어 보며 기도를 했었습니다.

어떤 목사님은 이런 말씀도 하시더군요.

원수를 사랑하는 것이 바로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다.

원수 없는 사람도 있겠지만, 원수가 있는 사람들에겐 그 원수를 생각만 해도 피가 거꾸로 솟아 오르잖아요.

혹시 여러분들에게도 그런 원수나 정말로 미워하는 사람이 있나요?

아마도 많을 거예요.

특히 직장 상사라든가...정말로 미워 죽겠는 사람이 한 두명은 있겠지요.

그런 사람들 때문에 내 마음에 스트레스가 되고 그 스트레스가 자신의 병이 되기도 합니다.

스트레스는 만병의 근원이란 말도 있잖아요.

한국 아주머니들에게 홧병이란 것도 있고요. 이 홧병 역시 원인이 스트레스겠지요.

그래서 자신을 사랑한다면 먼저 '원수나 자신에게 피해를 준 사람을 용서하고 그를 위하여 기도를 하여라'라고 어느 목사님은 말씀하십니다.

그것이 자신을 살리는 길이다라고 하시더라고요.

일면 맞는 말입니다만 그것이 말대로 됩니까?

알지만 인간적으로 힘들잖아요.

정말 그 사람을 생각하면 죽이도록 밉기도 하고, 만나면 패 주고 싶기도 한 것이 사람이잖아요.

패 주려고 하다가 상대방이 더 세면 자기가 맞을 수도 있기도 하겠지요.^^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면 어떻하겠어요?

그냥 잊으면 간단한데, 그리 쉽게 잊혀 집니까?

내버려둔다고 그것이 해결 안되잖아요.

그래서 평생 잊지 못하는 경우가 많지 않나요?

그런 것이 가슴속에 쌓여 쌓여 자신에게 병이 되고요.

이렇게 생각하면 인생살이 정말 힘들어요...

저 역시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 제일 지키기 힘든 말씀 중 하나였으며 왜 원수를 사랑 해야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어요.

그러나 하나님을 새롭게 만났을 때, 하나님은 제게 '모두 용서하고, 그들을 위해 축복기도를 해 주어라'란 말씀을 주셔서, 한국의 유명한 모 인권 변호사에게 명예훼손 관련 증거 자료를 제출한 상태에서 취하를 하였습니다.

이런 사실을 카멜레온이 잘 압니다. 이러한 일에 대해서 많은 이야기를 솔직하게 나누었으니까요?

지금은 카멜레온이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통 연락이 없어서 궁금합니다만...

아뭏튼 명예훼손 고소 직전에 취하를 하고 그들을 내 마음속에서 용서하기로 작정을 했는데, 가끔 제 속에서 울컥하는 것들이 남아 있었어요.

아직 완전하게 지우지 못한 쓴 뿌리(, 미움등)가 남아 있었던 거죠.

그때부터 그들이 생각날 때 마다, 한 명씩 한 명씩 나의 하나님께 그들의 건강과 행복을 위하며 축복 기도를 드렸습니다.

신기하게도 지금은 내 마음에 쓴 뿌리가 남아 있지 않습니다.

몇 년이 지난 지금에도 악플을 다는 사람들을 볼때면, 그들이 가엾어 지더라고요. 그리고 그들을 위해서 진정으로 축복의 기도를 하게 됩니다.

이것이 제가 예수님을 새롭게 믿게 되면서부터 일어난 저의 변화된 모습입니다.

이것 모두가 하나님이 제게 주신 축복이라 생각합니다.

물론 저는 믿음의 초기 단계이기에 믿음의 선배님들 앞에선 창피한 이야기입니다.

 

원수를 사랑하라. - 김웅태 신부님 (http://www.cateforum.com/evangelium/E-067.html)

1. 용서받음의 고마움과 기쁨

예수님의 이 말씀은 다툼과 갈등, 분쟁과 싸움이 많은 이 세상에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가르쳐 주시는 것이다. 우리가 상식적인 수준으로만 생각한다면, 예수님의 이 말씀을 도저히 알아들을 수도 없고 이해할 수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자신도 큰 죄를 지었지만 남으로부터 용서를 받아 본 적이 있다면 피해자의 너그러운 용서가 얼마나 고맙고 감사한지를 체험할 수 있었을 것이다.

 

2. 평화와 행복을 위한 사랑과 용서와 기도하는 마음

우리가 사는 인간 세상에는 평화와 행복도 있지만 평화와 행복은 마치 질그릇이나 유리 그릇처럼 쉽게 깨지기 쉬운 것도 사실이다. 우리 인간은 평화와 행복을 갈망하지만 그러한 행복을 누리기 위해선 참으로 인내와 용기와 사랑 그리고 용서와 관용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평화와 행복은 마치 자동차가 평화와 사랑을 싣고 잘 달리기 위해선 자동차의 기름이라고 할 수 있는 사랑과 용서 그리고 관용을 필요로 하는 것과 같다. 예수님은 우리가 참으로 행복해 하고 평화로울 수 있도록 아주 좋은 방법을 제시해 주셨다. 사랑과 축복과 기도하는 마음을 늘 간직하도록 가르쳐 주신 것이다. 이 세상에 사랑과 용서가 있다면 보다 더 행복하고 평화스러울 것이다.

 

3. 인간에 대한 예수님의 사랑과 이해와 용서하는 마음

그런데 우리는 생활하면서 왜 그토록 많은 갈등과 분쟁을 겪어야 할까? 실제로 개인과 개인, 공동체간에, 그리고 국가들끼리 혹은 민족간에 미움과 분쟁이 있고 서로 죽이고 파괴하는 일이 많이 일어난다.

이 모든 것의 배후에는 물질적 이해 관계가 얽힌 과도한 욕심이 있기 때문이다. 욕심이 많은 사람은 아무리 많이 소유하여도 만족할 줄 모른다. 그 욕심은, 예수께서도 사탄에게서 유혹을 받으셨지만 하느님의 말씀으로 물리치셨던, 재물·명예·권력에 대한 욕망이라고 볼 수 있다. 예수께서는 하느님의 나라를 세상 사람들에게 전하고 그것을 건설하고자 하셨을 때, 이러한 세 가지 방법으로는 올바르게 이룰 수 없음을 분명히 아셨다. 그러기에 일찍부터 그것을 포기하시고 거부하셨다. 예수님은 그것들이 처음에는 사람들에게 만족을 주고 일시적인 기쁨을 주긴 하지만, 인간들을 참으로 행복하게는 할 수 없다고 생각하셨다. 예수님은 이 모든 것을 포기하시고 마음을 비우시어 오직 사랑과 용서와 이해의 마음만을 간직하셨다.

 

4. 성인들의 모범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의 이러한 사랑의 길을 가고자 하는 사람들이다. 예수님을 본받아 이러한 길의 모범을 보여 주신 많은 성인들이 있다. 그중에는 중세의 물질적 타락에서 오직 청빈 정신으로 교회를 구해 내신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성인과 글라라 성녀, 또 제2차 세계 대전 중 악명 높은 유다인 학살의 대명사인 아우슈비츠 감옥에서 사랑의 꽃을 피우신 막시밀리안 콜베 성인, 그리고 물에 빠져 죽어 가는 세 부인을 건져 내시고 자신은 탈진하여 숨을 거두신 배문환 신부님 등이 있다. 이분들은 그리스도의 사랑의 길을 가셨고, 비록 이 세상에서 물질적으로나 명예적으로 혜택을 받지 못했지만, 그리스도의 영원한 행복과 평화에 들어간 분들이다.

 

5. 그리스도인들의 평화를 위한 선택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을 살아가면서 많은 유혹도 받고 분쟁도 겪으며 때로는 억울한 일도 당하지만, 그 때마다 원수까지도 사랑하신 예수님의 모범을 본받아, 영원한 생명과 참된 행복을 위한 선택을 할 줄 알아야 하겠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너희를 미워하는 사람들에게 잘해 주고 너희를 저주하는 사람들을 축복해 주어라. 그리고 너희를 학대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해 주어라"(천주교 루가 6, 27-28).

"내 말을 듣는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미워하는 사람들에게 잘해 주어라. 너희를 저주하는 사람들을 축복하고, 너희를 모욕하는 사람을 위해 기도하여라."(기독교 누가복음 6:27-28)